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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나쁜 평화의 몇가지 예들' :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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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커뮤니티 다모앙, '눈가리고아앙' 이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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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러전 관련해서 조금 생각을 나누고 싶은 부분이 있어 끄적여봅니다.


1. 3차 포에니 전쟁

포에니 전쟁은 로마와 카르타고의 지중해패권을 둘러싼 대전쟁입니다

칸나이 전투로 유명한 한니발이 자마전투에서 스키피오에게 패한 2차 포에니전쟁 결과

로마가 카르타고에 제시한 가혹한 강화조약중 '무허가 교전금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의 동맹국 누미디아가 카르타고를 자꾸 군사적으로 침범하고 건드리자 

자위적으로 행한 군사행동을 빌미로 로마 원로원은 카르타고에게 선전포고를 떄립니다

아마도 '가장 나쁜 평화가 전쟁보다 낫다'는 관점에서 카르타고는 굴욕적으로 사과와 함께 강화를 요청했고로마는 무기몰수등의 조건을 내밉니다

전쟁을 두려워한 카르타고는 이에 따랐으나 그 결과는 로마의 수도 추방령이었고

지배층 상당수가 도망친 카르타고 수도에서 3년여의 격렬한 수비전을 벌이던 카르타고 시민들은 전쟁중 사망하거나 패전후 모두 노예가 되고 그 땅은 폐허이하의 땅이 되어버립니다


2.  오사카의 겨울/여름 전투

전국시대 말기 히데요시 사후 일본은 도요토미 계 vs 도쿠가와 계로 갈라지게 되고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요토미 계열의 이시다 미츠나리가 패하고 전국대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잡게 됩니다

그러나 에도(현 도쿄)가 근거지인 이에야스의 영향력은 교토 서부나 규슈까지는 그렇게 공고하지 못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정복할 군사적, 물적 역량은 부족했기 때문에 꽤 오랜시간 힘을 기르기로 하였습니다

한편 서군측의 상황을 보면 히데요시와 요도도노(오다 노부나가의 조카딸)의 아들이 있었으나 어렸기 때문에 차차를 위시하는 반 섭정구조로 도요토미 가문의 세력은 컸지만 결속력과 지배력은 다소 부족했습니다

몇몇 영주들이 내부에서 경쟁하며 서로 파먹는 일도 발생할 정도로요

그렇게 십수년 두 세력의 차이가 벌어지다가 결국 1614년 두 차례에 걸친 오사카 전투가 벌어지게 됩니다

오사카성의 방여력에 확실한 승부를 내지 못하던 도쿠가와는 서양대포를 이용해서 일종의 허장성세를 펼치는데

이 와중에 운나쁘게도 차차의 주변에 있던 시녀들이 눈먼 대포알때문에 폭사하는 광경을 목격하고 성이 동요하자 이에야스는 강화조건을 거는데

그중 하나가 전술적으로 도저히 넘기 힘들었던 오사카 성의 '해자'를 메우고 '외성'을 허물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그 '나쁜 평화'가 작동하여 

적지않은 가신과 지휘관들이 결사항전만이 살길이라 간언했음에도

많은 낭인들과 군병유지에 드는 천문학적인 비용문제와 보신주의에 빠진 차차는

해자와 외성의 해체를 받아들이고 도쿠가와는 재빨리 실행해버립니다

그 후 안되겠다 싶어 다시 해자를 파고 외성을 세우려 하지만

기다렸던 도쿠가와는 해자도 외성도 없는 오사카성을 3배의 병력으로 들이치고

도요토미 가문은 멸망하고 도쿠가와의 에도막부가 열리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수명연장의 지푸라기일 수도 있고

또 어떻게 보면 잘못된 선택들의 누적으로 결국 피할 수 없게된 비극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나쁜 평화가 패전의 서막이었던 것이라면

그건 아마도 진즉에 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평화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이미 평화상태가 아니었던 것이죠


어느 한쪽을 두둔하거나 미화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만

우리에게 러우전쟁의 의미는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를 정하는 것 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그동안의 발자취를 조금 긴 호흡으로 살펴보고

어떻게 해야 양측에서 벌인 실수를 피할 수 있느냐에 집중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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